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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mpolitics

꼰대, 성 담론, 혐오 발언 그리고




오랜만에 대학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해 보았다. 하루에 글이 다섯 개 쯤 올라오고 있다. 내가 재학생이던 시절에는 하루에도 글이 몇 페이지씩 넘어갔었다. 한 페이지에 20개의 글을 표시하니까, 족히 100개씩은 올라왔었나 보다. 그 땐 나도 하루에 몇 번씩 접속해서 뭐 재미있는 거 놓치지 않았는지 열심히 살피곤 했었다. 게시판은 사적인 고민 상담부터 정치·사회에 관한 내용까지, 다루지 않는 영역이 없었다. 대학 커뮤니티 답게 전공과 진로, 교수님과 학과목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또한 '공론의 장'으로서 선거철이면 유난히 시끄러운 곳이기도 했다. 대선이나 총선은 물론이고 총학생회 선거 시즌에도 유난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시험기간에는 활동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공부는 하기 싫고, 대놓고 놀기에는 죄책감이 따르니 책상 위에 전공 서적과 함께 펼쳐진 모니터에서 쓸 데 없는 글들을 하나씩 다 읽곤 했다.


졸업 이후에는 자연스레 게시판에 접속하지 않게 되었고, 1년에 한 두번쯤 들어가 추억팔이를 하곤 했다. 현재 커뮤니티에는,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구성원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재학생이 주가 되고 간간히 졸업생의 글이 보였다면 지금은 정 반대가 되었다. 10여년 전부터 신규 유입은 줄어왔고, 기존에 있던 사람들만 남은 결과다. 찾아보니 요즘 학생들(내가 이런 용어를 쓰게될 줄이야)은 '에브리타임'이라는 사이트에서 많이 활동하는 모양이다. 새로운 곳에 가봐야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고, 텅텅 비어버린 예전의 커뮤니티를 보고 있자니 쓸쓸한 마음이 든다.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드문 드문 올라오는 글 중 상당수가 직장 생활에 관한 내용이다. 오랜만에 게시판을 뒤적거리던 중 [팀장 생활 7개월 소감]이라는 제목의 글이 눈에 띈다.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았고, 황무지같은 커뮤니티에 어울리지 않게 조회수와 댓글이 많다. 자연스레 손이 가서 글을 읽게 되었다.



이렇게 올리면 동문들이 알아보려나...




글쓴이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팀장의 자리에 올랐다지만 진작에 꼰대의 반열에 서있던 사람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편견과 혐오, 구태에 물들어 있으며 그러한 생각들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표현할 수 있음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이 커뮤니티에는 아재들만 남았다더니, 이젠 관리자 직급으로 올라가는 아재들이 겨우 이런 글에 공감하는 건가.

댓글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린다. "글쓴이는 꼰대다", 그리고 "글쓴이가 꼰대라는 것들은 사회생활도 안해봤냐? 공감된다"라는 식의 이야기들.




vs




그 와중에 익명의 글쓴이는, 미처 적지 못한 몇가지가 생각났는지 "몇가지 더하"겠다며 본인 글에 댓글을 단다.





글쓴이는 구제불능의 꼰대가 되어버린 건가. 사람들의 질타를 알아듣지 못하거나, 혹은 귀를 틀어막은 채 자기 할 말만 하고 있다. 결국 나도 댓글을 쓰기 시작한다. 공공의 게시판에 흔적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개저씨'를 사회 생활의 당연한 결과로 두둔하는 자들의 모습을 가만 보고있을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음 날 들어와 보니, '대댓글'이 달려 있다. 진보주의와 좌파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보수성'이라 비판한 부분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논의를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가며 반박을 하고 있다.





해당 유저와 나의 논쟁은 그 때 시작되었다. 많은 논쟁이 그러하듯 논점은 이리 저리 튀어 나갔고, 댓글의 길이는 점점 늘어났다. 하루에 한 번 정도 주고 받은 논박은 일주일간 지속되었고, 어느 시점에서 나는 그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정신나간 소리처럼 들리지만, 언뜻 이성적이고 때로는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게 꾸미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갑론을박은 글 제목과 같이 꼰대, 성 담론, 혐오 발언 그리고 다른 소재들과 관련한 내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표현할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나의 공간에 나의 글을 쓸 때처럼 여러번 퇴고하지 못하여 맞춤법이 엉망이고 논리가 분명하지 못한 면이 있으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기기로 했다.





■■■■: 상대방 닉네임

□□□□: 대학 커뮤니티 이름


본인


비추천과 추천 숫자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인 것 같습니다. 팀장 입장에서 어떤 팀원이 마음에 드는지 밝힘으로써 동문들의 회사 생활에 현실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고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겠죠.

다만 제가 느끼기로 몇몇 분들이 '꼰대' 이야기를 한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1 대부분은 뻔한 내용.
보고서를 작성할 때 고민이란 걸 해보고 팀장에게 가져가야 한다, 붙임성 있게 해야 이쁨 받는다, 업무 과정 / 결과 / 타 부서 협의 등에서 능력 있는 사람은 이쁨 받는다, 회사 생활 한 달만 해봐도 다 아는 내용이죠.. 팁이라면 팀장에게 가끔 사내 돌아가는 얘기를 전해준다든지.. 하는 내용 정도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팀원의 입장에서 위의 뻔한 이야기는 들을 기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팀장과 팀원이 서로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이런 팀원이 좋더라'는 말만 끊임없이 반복된건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죠. 요즘 사람들은 차라리 "의욕 없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동기부여를 해보았다. 리더라는 자리가 이렇게 힘들더라"라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 보수성
'짬 찬 여자는 다루기 힘들다'는 표현 등이 거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세금 함부로 쓰일까 걱정해주시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육아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개인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여성과 그 사회적 구조에 대해서도 함께 걱정해 주시면 '꼰대' 소리는 안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3 확증

본인 업무 아님에도 팀이 바쁘게 돌아갈때 남아서 도와주는 척이라도 하는 애티튜드. 팀장 입장에선 너무 고마움. 물론 도움 안되고 저녁 먹고 들어갈거 알지만 그래도 그런 모습이 계속 기억남

요즘 젊은이들이 허투루 쓰는 외래어 '애티튜드'와 같은 용어를 썼지만 결국은 야근 지옥을 만들어내는 담론의 재생산이라고 봅니다. 어떤 팀원을 이뻐하시는지 취향을 공유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라고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상대방


2. 그 걱정을 같이 해준다고 해서 공공기관이 세금이 불성실한 직원에게 허투로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바뀌진 않죠. 그냥 (기준도 애매한)진보주의 가치관 좋아하는 독자들에 한정해서 귀에 듣기 좋고 호감을 줄 수 있을진 모르겠습니다만...

게다가 결국 그 걱정의 발로란게 최종적으로 좌파정책 좋아하는 사람들 특유의 "엄한 다른 사람이 낸 세금으로 특정집단에 지원을 넣자" 혹은 세금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공동체 비용으로 어떻게든 메꿔주자는 분배지향적 결론밖에 뭐가 더 나오겠습니까?




본인


글쓴이가 이른바 '짬 찬 여자'를 싫어하는 이유라고 쓴 게 근무시간 중 육아와 관련된 전화통화를 한다는 사실이라서 지적한 겁니다.

첫째는 이른바 '여혐'의 그림자가 짙다는 사실에서 문제삼고 싶습니다. 두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공공기관에 존재하는 불성실한 직원은 세금의 낭비겠죠. 하지만 사회 생활 해보셔서 아시겠지만 회사에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있습니다. 글쓴이가 싫어하는 인간 부류인 '고졸(상고) 여자' 중에 업무 능력 인정 받아서 연봉 띄우며 이직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사각지대에 핸드폰 게임 돌리고 팀장 눈치봐가며 하루종일 루리웹 쳐다보는 남직원도 있습니다. 무슨 얘기할 지 뻔해서 더 안 써도 아시리라고 생각됩니다.

둘째는 제가 "(기준도 애매한)진보주의 가치관 좋아하는 독자" 또는 "좌파정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육아의 책임을 남성과 여성이 함께 가져야 한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애 학교 잘 갔는지 유치원 잘 갔는지 확인하는 것"은 남직원이든 여직원이든 근무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고 이해해줘야되는 부분이 아닐까요?
가정에서 더 나아가 육아를 사회적 책임으로 보는 시선을 단순 분배지향적 결론으로 보시는데, 계속해서 육아 책임을 개인과 가정에 한정한다면 결론을 무엇인가요? 제게는 집에 도우미 아주머니를 상주시키거나 양가 부모님 댁에 맡길 상황이 안 되는 사람들은 육아를 포기하라는 결론으로 보입니다.




상대방


첫째, 여혐의 그림자가 짙은 것은 실제로 글쓴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요즘 들어와서 갑자기 그런 표현을 규제하는 것이 일반도덕의 반열에 올라버린 양 꽤 당당한 태도로 일방적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그런 요구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엔 쇠퇴하고 말꺼라고 확신합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먼저 지금까지 다들 그냥 별 문제없이 넘어갔을 뿐이지, 여자들의 언어습관과 사회일반의 표현에서 남혐에 해당하는 표현과 아이디어들이 넘쳐나거든요. 지금까지 해오듯 이중잣대로 한쪽만 민감하게 반응하고 한 쪽은 그러려니 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위선의 도가 지나친 형태라서 장기적으로 지지받기 힘들며 양쪽 다 동일한 기준으로 규제하기 시작하면 이건 또 골때립니다.
자연스럽게 이게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지는데, 아무리 표현의 자유를 제약해도 남혐이든 여혐이든 그런 표현이 나오게 된 본질과 실체가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사람들의 속마음마저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좌파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 중에 언어가 실체에 영향을 주다 못하 오히려 쥐고 흔든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있다 는 식의 괴이한 언어이론의 신봉자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조금만 침착하게 생각해도 장기적으론 실체가 언어를 만들고 언어의 방향성을 주는거죠. 물론 이런 분야의 흐름이란 건 최소 수십년짜리 흐름이니까 우리 한 인생 죽을 때 까지야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인위적으로 틀어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택도 없는 시도이고 결국 기력이 쇠해서 무너지고 말 허망한 시도입니다. 차라리 파도를 손으로 막고 말지.


둘째, 글쎄요. 이해해줘야 되는 건지 아닌지는 언제나 그렇듯이 "정도"의 문제겠죠. 위 글의 사례에 해당하는 여직원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 바 없으니 더 이상 확정적으로 말하기 힘들지만, 제 개인적인 경험과 윗글에 묘사된 추가적인 단서징후들로 봐서는 이해해줄 수 있는 정도를 다소 벗어난 지점이 아닌가 추측이 생깁니다.

저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컨셉 자체가 근본적으로 이해가 안 갑니다. 원칙적으로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국 다 개인책임이지 어떻게 사회가 책임의 주체가 된단 말인가. 정도 감상이네요. 특정집단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힘을 모아 공동사업을 할 순 있지만(대표적으로 국방, 치안, 상하수도 정비, 법률 서비스 등) 그외에는 대단히 엄격하고 한정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특정집단에의 특수혜택을 주는건 어쩌니 저쩌니 길게 말해도 엄한 남의 돈으로 다른 사람 호주머니 채워주는 분배정책이죠.

너무 거시적인 이야기는 이쯤하고, 출산 이슈로 좁혀서 더 말해보자면 21세기 현대 한국인의 각 개인들은 인류라는 종족이 생겨난 이래 그 어느 시대 그 어느 문화권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물질과 복리후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어려운 시절에도 출산율은 충분히 높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출산을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결코 물질부족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냥 관념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사고방식이 바뀐 것이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이 관념 부분을 현대사회 이전 처럼 출산지향적인 마인드셋을 갖도록 유도하는 거 정도가 유의미한 시도가 될수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반대합니다. 시대의 관념이란 것도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말고 그냥 흐름대로 두는 것이 최적이라고 보거든요.
결론적으로 출산은 당연히 개인의 책임이고, 개인의 선택입니다. 각자 자기에게 더 효용이 커 보이는 선택지를 잡을 뿐이고, 그것에 대한 결과값도 오롯이 개인의 몫입니다. 

P.S.과거에도 출산율이 기록적으로 낮은 적은 많았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나폴레옹 이후 프랑스, 빅토리아 시대 영국. 모두 공통점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웠고 각기 자기 시대에서 자신들의 발전의 최정상에 올랐다고 생각하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저출산도 시간의 흐름 내지는 세대교체에 의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꽤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습니다.




본인


먼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님의 생각은 차치하고서라도, 공적인 공간에서 본인의 여성 혐오적 생각을 정제 없이 드러낸 글쓴이를 꼰대라 칭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저는 최근 웹상에서 ‘미러링’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남성 혐오 또는 여성 우월주의적 활동이 올바르지 않을 뿐더러 페미니즘 운동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포인트에 대한 ■■■■님의 글을 요약하면 ‘혐오 표현에 대한 완벽한 규제는 불가능하다’ 정도가 될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원천적 차단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그러한 노력을 멈춰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남혐에 해당하는 표현과 아이디어까지 동일한 기준으로 규제하기 시작하면 “골 때린다”고 표현하셨는데, 그렇게 골 때릴 것도 없습니다. ‘규제’라는 표현을 쓰셨기 때문에 정부나 법이 주체가 되어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시민의식의 문제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했던 성차별적 언어와 생각을 하나씩 고쳐 나가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인종차별적 언어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로부터 점차 개선되어왔고 앞으로도 나아질 거라는 겁니다.

두번째 이유에서 언어결정론적 논의를 사전에 차단하셨는데, 굳이 그 부분을 논의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속마음에 이질적 존재에 대한 혐오가 내재한다고 굳이 인정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표현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여혐이나 남혐 자체를 옹호하시기 보다는 이것을 막고자 하는 것을 ‘택도 없는 시도, 허망한 시도’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 이유와 같은 예를 사용한다면, 네오나치즘이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듯이 이른바 ‘여험/남혐러’에 대해 꼰대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질 것이고, 그래야 합니다.


이전 댓글에서도 넌지시 표현했습니다만 “육아가 사회적 책임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을 때 그 책임은 단순히 경제적인 부분에 국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합니다. ■■■■님이 이미 알고 계신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겠지만 되풀이 해보죠. 육아를 가정에서 책임질 때 그 역할은 역사적으로 여성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자의든 타의든 사회에 진출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슈퍼맘’, ‘슈퍼우먼’, 뭐라고 부르든 간에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책임을 짊어지게 된 거죠. 그래서 육아의 책임을 져야할 부모가 모두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보편화된 지금, 그 책임을 사회에서 일정 부분 함께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고 하시는 그 컨셉의 대표적인 기관이 어린이집이 되겠습니다만, 아직 부모의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기 때문에 (부족한 기관 및 교사의 수, 이로부터 기인하는 육아의 질, 부모의 출퇴근 시간과 연동하기 어려운 운영 시간 등등) 계속해서 사회적 책임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국 다 개인책임이지’라고 말씀하시는데, ‘내 자식 내 손으로 키워야 한다’라고 생각해서 부모가 어떻게든 열심히 키우는 개인에 대하여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어린이집의 운영 비용이 되었든 부모가 위탁하는 비용이 되었든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가 이것을 지원해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부분을 ■■■■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자유 경제를 신봉하실 것으로 추측되는 ■■■■님께서는 해당 분야의 서비스 산업을 활성화하는 것에 동의하실 것 같고, 저는 보편적 복지의 시각에서 다가가겠죠. 해당 부분을 미리 쓰실 때 ‘엄한 남의 돈으로 다른 사람 호주머니 채워주는 분배정책’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봐서 이 이야기는 저희 논의 중 가장 평행선에 가까운 부분이 될 것 같아 더 발전시키지는 않겠습니다.

출산 이슈와 관련해서 누군가가 ‘요즘의 젊은이들은 부모보다 나은 경제적 번영을 누리지 못할 것으로 예측되는 세대’라고 표현했는데요, 저는 이러한 시각에 동의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류는 물질적으로 발전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미래를 장밋빛으로 전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쟁통에도 애 잘만 낳고 살았는데 배부른 소리한다”는 시각에 반대하는 것이죠.
당연히 출산은 개인의 선택입니다. 다만 인구분포가 비정상적인 형태로 변해가고 있고, 국가의 입장에서 이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시 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빅토리아 시대 영국까지의 예를 제시하셨습니다만, 그 때에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지금처럼 획기적으로 늘어나지 않았죠. 언젠가는 노동 가능 인구의 문제도 인공 지능에 의해서 해결될지 어떨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구 절벽과 노령층 비율 증가 속도를 보면 중단기적 대책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시간의 흐름,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기 전에 큰 위기를 예상되기 때문이죠. 말씀하신 것처럼 ‘각자 자기에게 더 효용이 커보이는 선택지를 잡을 뿐’입니다. 이 때 출산과 양육이라는 선택지가 지금처럼 어려운 선택지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상대방


추가적인 논지를 쓸 필요 없을 것 같고, 몇 가지 부연만 징검다리 건너듯 띄엄띄엄 덧붙이겠습니다.
1.
아닙니다. 제가 남혐이하는 표현을 쓸 때 인터넷 문화에서 요새 유행중인
 미러링 같은 유치한 시도는 애초에 염두에 둔 적도 없습니다. 그건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유아적인 땡깡현상에 불과했거든요. 
제가 말하는 남혐 내지 온갖 대상에 대한 혐오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만연한 전통적인 언어 행태입니다.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서 넘어간거지, 여혐논란에 들이대는 잣대로 분석하기 시작하면 깜짝 놀랄정도의 혐오가 모든것에 만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금 여혐이슈에 적용되는 기준으로 일일히 바로잡으려 드는건, 우리가 쓰는 기존 언어의 절반 이상을 갈아 엎어야 할텐데, 아직 가보지 않을 길이라서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꽤 (나쁜의미로) 재미있는 세상을 만들어낼 것 같군요. 아니면 지금까지 해오듯, 몇몇 진보주의 먹물들이 멋대로 선정해준 특정 선별집단에 대한 것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위선적인 이중잣대의 세상을 만들게 되겠죠. 어느쪽이든 오래는 못 버팁니다.

언어적 혐오표현의 원인에 대해 님과 저와 가장 큰 차이점은 님은 단순히 이질성에 대한 거부감(요컨데 일종의 착각 내지 착시)을 원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고 저는 그 외에 혐오할만한 타당한 실체가 있어서 혐오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차이겠지요

2.
언어결정론은 뭐 길게 이야기 안 해도 인문학 계열 친구들이 좋아하는 괴상한 유사과학의 한 부류에 불과합니다.
진지한 검증과 학문적 증명의 시도가 지금까지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성공한 적 없다는 것은 누구라도 동의할 꺼고, 저는 향후에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꽤 확신하는 편입니다. 앞으로도 몇 가지 인상적인(그렇지만 대단히 의심스러운) 정황사례만 프로파간다로 소모되며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강조당할 뿐이겠죠.

3.
육아를 전반적으로 여자가 주로 분담하게 되는 것은 역사적인 흐름을 넘어서 사실 종족적으로 정해진 디폴트 값이겠죠. 물론 디폴트 값이라는 것이 그것에 고정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니, 각 개인의 여건과 환경에 따라서 그 개인에게 최적화된 다른 선택은 할 수 있습니다.

4.
네. 저는 왜 사람들이 자유시장의 놀라운 메커니즘과 강력한 자동조절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가끔 놀라곤 합니다.
어린이 집이 일반 소비자들의 수요가 많고, 이것으로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사업자들이 뛰어들어서 세상이 요구하는만큼의 수요를 적정한 가격에 충족시켜줄 수 있습니다. 이미 잘 이해하고 계시다시피 어린이 집 이슈로 넘어가도 제 입장에선 여전히 사회적 책임 이라는 컨셉으로 넘어갈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군요. 
사회적 책임이라는 단어에서 경제적 의미외에 그 어떤 방향으로 우회를 시도하셔도 끝내는 한정된 경제적 자원의 재분배가 사회적 책임이라는 컨셉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되죠.

5.
출산율이 낮은 이 시점에 (기왕 낮은 출산율이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평균수명이 높은 것은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볼 때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입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생산가능연령이란 것도 함께 늘어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 이전의 60대 이상 구성원의 평균적인 건강과 생산력을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5060 이상세대의 건강과 생산력은 비교할 수 없게 우수합니다. 평균수명의 증가는 전체 사회구성원의 생산력도 함께 끌어올리는 요소로써 결코 부정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자꾸 복지로 돌아가는 사회를 상정해두고, 일면식도 없는 젊은이가 엄한 돈 쥐어짜여서 일면식도 없는 생산력 없는 늙은이라는 거대 집단을 부양한다는 그런 세계관으로 사태를 보니 문제로 느껴지는거지, 각 개인의 생산력에 걸맞는 소득을 올리고 저축하고, 자기 입장에 걸맞는 지출을 유지한다면 평균수명의 증가는 애초에 문제가 아니며, 출산율의 감소는 일시적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P.S.
댓글의 논리흐름이랑 별개로 뜬금없이 하는 넋두리입니다만
항상 느끼는건데, 좌파경제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돈 걷고, 자기들끼리 원하는 복지 제도를 실행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가끔합니다. 저처럼 그런거 싫어하는 사람은 좀 빼구요.
냉전시대가 가진 유일한 장점은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고 믿는 시스템을 선택할 수 있었던 점인 것 같습니다.
아 물론 구 공산권은 사실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야! 라던가, 공산권과 비 공산권의 자유로운 개인의 이동의 불가능했어! 라는 현실적인 제약은 일단 잠시 제쳐두고 하는 농담입니다.

만약 각 개인이 원하는 시스템을 선택해서 살게 해줌으로 인해 우리 따뜻하신 진보시민들끼리 모여서 국가 만들고 저 같은 이기적이고 사악한 수구꼴통들끼리 모여서 국가 굴리고 하면, 백이면 백전백승 이미 역사에 존재했던 냉전의 결말이 다양한 형태로 몇 번이고 반복되고, 결국 꽤 많은 역사적 교훈과 실증이 쌓이고 진보의 구원이라는 믿음 자체가 없어질 수 있을텐데,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차피 넋두리로 하는 소리고 인위적으로 역사적 교훈을 쌓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조급해 하지 말고 그냥 한 몇 백년 정도 기다리면 깨닫기 싫어도 언제가 모두에게 깨달음이 오리라 믿고 사는 수밖에.




본인


0. 누구나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방의 주장을 해석하고 논의를 이끌어 나가는 면이 있겠으나, 이제는 분배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제 댓글을 이용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새나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불필요하게 좌파, 진보 진영을 조롱하며 공격적인 성향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는 인상입니다. 제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저와의 논쟁보다는 다른 □□□□ 유저를 의식하셔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수년 전의 □□□□이 지금과 비교했을 때 좌파적 주장이 우세했던 공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때 다수에 의해, 가끔은 비논리적으로 의견을 묵살당하셨던 경험이 있는건지 궁금해지네요.

1. 제가 미러링 이야기를 꺼낸 것은 최근 인터넷에서 글을 쓰거나 댓글을 달거나 하는 사람들이 여험 / 남혐의 두 가지 카테고리 안에 갇히는 현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별 시답잖은 커뮤니티 공간에서 페미니즘을 배웠다고 하는 헛소리들을 해대서 일단 선을 긋고자 한 겁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언어가 혐오 표현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가정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혐 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 인류의 절반을 성으로 분류하여 그 범주에 대해 일반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그렇게 분류된 여성이라는 범주가 아직도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범주는 몇몇 진보주의 먹물이라고 경시하시는 특정 인물들이 멋대로 선정해준 결과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외치는 각양각색의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어떤 것들은 이른바 대중으로부터 동의를 이끌어내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못하죠. 제가 두번째로 제시한 이유가 해결된다면, 즉 여성의 사회·경제·문화적 지위가 남성과 동등하다면 혐오 표현에 대한 민감도가 조금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옳은 것은 아니지만요.
“역시나 짬 찬 여자는 다루기 힘들다.(예상하겠지만 무기계약직, 고졸 여상 졸업해서 나이 42살/아침 하루 일과가 전화들고 애 학교 잘 갔는지 유치원 잘 갔는지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해 유치원 교사와 학교 교사와의 전화통화를 왜 근무시간에 하고 지랄..)”
위는 제가 문제삼고 싶었던 표현입니다만 어째서 이런 것을 바로잡는 일이 우리가 쓰는 기존 언어의 절반 이상을 갈아 엎는 것으로 비약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여혐 표현을 조심한다고 해서 절반씩이나 우리 언어 생활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뿐더러, 그렇다 하더라도 꽤 (좋은 의미로) 재미있는 세상을 만들어낼 것 같습니다.

저도 모든 혐오를 착각 내지 착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혐오할 만한 타당한 실체가 있어서 혐오의 원인이 되고 있다”라는 표현은 조금 위험해 보이네요. 지금 우리가 논하는 혐오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독일에서의 유대인, 유럽과 미국에서의 흑인에게도 혐오할 만한 타당한 실체가 있다고 믿었겠죠.


2. 언어결정론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그에 입각해서 논지를 펼치지도 않았으며 그 사실을 미리 밝혔는데 굳이 한 꼭지를 할애하시는 이유라도…?

3. 각 개인의 여건과 환경에 따라서 그 개인에게 최적화된 다른 선택이라는 것은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죠. 맞벌이 부부가 육아에 대해서 동등하게 책임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맥락이 형성되었다면 이 이야기는 시작조차 안 했을 겁니다.

4. 중간에 웃자고 하는 이야깁니다만, “끝내는 경제적 의미가 사회적 책임의 전부”라고 이야기하시는 모습이, 알만한 사람의 유물론에 토대하는 것 같아 재미있네요. 이미 위에서 지적했습니다만 분명 다른 방향에서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시 ‘그 문단’을 가져와보죠.
“역시나 짬 찬 여자는 다루기 힘들다.(예상하겠지만 무기계약직, 고졸 여상 졸업해서 나이 42살/아침 하루 일과가 전화들고 애 학교 잘 갔는지 유치원 잘 갔는지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해 유치원 교사와 학교 교사와의 전화통화를 왜 근무시간에 하고 지랄..)”
물론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위의 글로만 해당 여직원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글쓴이는 ‘후기’라는 이상한 제목에 비슷한 얘기를 덧붙여 해당 여직원은 개념이 없다는 주장을 강화하고 있네요.) 근무시간에 애 유치원 잘 갔는지 교사와 통화하는 건 자연히 필요할 것이고, 이 부분에 대한 당연히 이해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부터가 사회적 책임이란 겁니다. 저런 통화를 하는 남직원은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이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회적 책임이고, 나아가 저런 통화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면 사회적 책임이 더욱 잘 작동하고 있다는 거겠죠.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논의를 곧 죽어도 발전시키고 싶으신 것 같은데요. 어린이집의 수요가 적정 가격에 충족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보편적 복지의 차원에서 같은 사안을 바라보는 입장에 반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시장의 놀라운 메커니즘과 강력한 자동조절 기능’ 이야기는 제가 18세기에 인터넷을 하고있나 싶어서 놀랍네요.

5. “자꾸 복지로 돌아가는 사회를 상정해두고, 일면식도 없는 젊은이가 엄한 돈 쥐어짜여서 일면식도 없는 생산력 없는 늙은이라는 거대 집단을 부양한다는 그런 세계관으로 사태를 보는” 이유가 뭘까요? 말씀하신 60대 이상의 좋은 건강과 생산력에 대해서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건강과 생산력만으로 실업률이 0인 이상 사회를 그리셨는데, 이게 단순히 ‘신입사원은 반으로 줄어도 정년이 늘어나니 괜찮은’ 문제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겁니다. 정치 성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 행복할 거라는 착각. 그런 유아적 환상에 집착하다 보니 민주주의에 적응하지 못하는 거겠죠.

몇백년 지나면 모두에게 ■■■■님의 것과 같은 깨달음이 온다니,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이후로 가장 신선한 발상이네요.




상대방


0. 
착각 아닙니다. 한국의 인터넷 문화란 놀라울 정도로 일방적인 친좌파성향이 가득한 공간인지라 제 관점은 □□□□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넷 커뮤니티에서 십 수년 넘게 증오와 공격의 대상이었습니다.
덕분에 언제나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다수에 의한 린치를 의식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좋은 습관은 아니지만, 십 수년 간의 경험으로 배인 습관인지라 깨닫기도 전에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곤 합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이 습관을 유지하는 것은 저 같은 성향의 사람에겐 여전히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에 도움이 됩니다.

1. 
21세기의 여성이 정말 사회적 약자를 자처할 수 있는 입장인가에 대해서 저는 꽤 회의적입니다. 약자라는 딱지를 명분으로 민감도가 높아지는 이중잣대도 긍정적으로 보기 힘듭니다.
1-(2)
물론 유대인은 혐오할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흑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실체가 있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실체가 있습니다.
그 혐오가 유대인의 경우 홀로코스트라는 납득할 수 없는 형태의 결과로 이어진 것은 실로 유감스럽고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은 혐오자체를 타파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결론을 주기보다는 혐오가 제도화되거나 정치화 되어선 안되다는 교훈을 줍니다. 물론 저는 혐오 뿐만 아니라 가능하한 모든 것이 제도적, 행정적으로 접근되고 다뤄지는 걸 싫어합니다만, 혐오의 경우엔 특히나 더 조심해야겠죠.


2. 
0호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어떤 형태로든 누구에게든지 갑자기 개입당하여 공격받을 수 있는 부분에는 미리미리 약을 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3. 
동등하게 책임을 나눈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군요. 사회적 맥락이라는 것도 그렇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가부장제"가 우리를 억압하고 있어!! 류와 비슷한 논지일련지?

동등하게라는 기묘한 기준보다는 양 당사자간에 합리적 협의하여 두 사람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형태로 나누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현대한국의 가정문화가 그 정도 합리성의 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중세적인 문화는 아니라고 봅니다.


4.
잘 읽어내셨습니다. 맑스의 최종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유물론적 세계관과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식의 역사관에는 거의 동의하고 있습니다.
4-(2)
글쓴이의 후기는 보지 않았으니, 일단 제끼고, 원글에 제시된 단서들만 기준으로 봤을 때, 이미 해당 여직원이 다른 직원들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같은 월급과 고용보장을 받는 조직원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원 글쓴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금을 축내는 직원"인데 어떤 이유로 그런 불성실한 조직원이 되느냐는 각 케이스마다 원인이 천차만별이겠죠.
여러 원인 중에서 님은 그게 여직원의 육아 부분과 연관된다면 "낮은 생산성"을 사회적으로 용납해줘야 한다는 말씀인데, 결과적으로 사회적 책임이란 단어를 아무리 다른 루트를 우회해서 설명하려고 해도 "낮은 생산성"을 누구의 비용으로 메꿀 것이냐 란 점에서 이건 경제적인 재분배의 문제입니다.
4-(3)
멍청한 고전주의 경제학이 선량하고 똑똑한 진보주의적 주장에 의해서 논파되었다는 진보대중의 믿음과 달리 유감스럽게도 경제학에서는 자유시장의 강력함은 끊임없이 갱신되고 반복적으로 증명되는 사안입니다.
물론 고전주의 경제학은 워낙에 나이브하고 몇몇 구멍이 있어 보완이 필요했지만, 자유시장에 대해서라면 그 기본골자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학문적으로 계속 강화 되고 있습니다.

5.
60대 이상의 건강과 생산력을 활용할 수 있는 형태의 생산구조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설계주의적으로 자꾸 뭔가 사회가 주도적으로 큰 그림을 그려줘야만 레밍 떼 처럼 개인들이 적응할꺼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 생산력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당연히 적절한 형태로 끌어다 쓰게 되어 있습니다. 구조란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가 또 다시 해체되는 흘러가는 물건에 불과합니다.
5-(2)
아마 급하게 읽다가 잠깐 맥락을 놓치신 것 같은데,
신입사원이 줄었지만, 정년이 늘어나서 괜찮아 라는 뜻은 아니었고
어차피 신입사원이 줄어드는 것은 디폴트값으로 놨을때,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지금이 평균수명이 짧았던 과거의 저출산시기보다 더 나은 상황이면 나은 상황이지, 지금이 특별히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은 아니란 뜻이었습니다.


여담)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고안된 정치체제 중 그나마 덜 위험하기에 마지못해 동의하고 있을 뿐,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본적도 없고, 최선은 고사하고 그럭저럭 괜찮은 시스템이라고조차 느껴본 적 없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라면 더 나은 대안을 떠올리지 못하는 본인의 아둔함과 인류의 발상력 부족을 언제나 한탄할 뿐입니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은 통찰력 넘치는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긴 하지요.




본인


근원적으로 생각이 다른 부분들을 의식해서 자의적으로 가지치기를 하고, 넘버링을 바꿨는데 양해 바랍니다.


1. 사회적 약자 / 여성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언제 주어졌는지, 공·사 영역의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록 여성의 비율은 얼마나 줄어드는지, 와 같은 뻔한 수치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건너 뛰고, 개인적인 (그러나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보죠.

제가 몸담았던 회사는 B2B 영업 조직이었습니다. 낮은 직급에서는 실무를, 높은 직급에서는 관리를 하지만 말단 사원부터 사장까지 모두 거래처 사람들과 만나는게 중요한 일이죠. 거래처 접대 방식은 뻔하지만 점심 시간에 밥 먹고, 퇴근 이후에 술 마시고, 주말에 골프치는 방식입니다. 사원·대리 직급에서는 어차피 윗 사람들 따라다니면서 숫자 맞추는게 대부분이기 때문에 성의만 보이면 됩니다. 그러나 과장부터는 독자적인 영업력을 갖춰야 하죠. 여기서 여직원들이 도태되기 시작합니다. 여직원들도 본인이 원하면 밤에 술 마시고 주말에 운동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술자리의 형태로 인해 일차적으로 제한되는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도 거래처 쪽에서 달가워하지 않아요. 그래서 과장 이상의 직급을 가진 여직원들은 아예 영업을 포기하고 실무에 집중했지만, 동급의 남직원에 비해 연봉 차이가 벌어진다는 것은 공공연한 일입니다.

어째서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는 것에 회의적일까, 라는 생각을 꽤 오래 했습니다. ■■■■님이 저보다 윗학번이고, 그래서 사회생활도 길게 하시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그래서 위에 쓴 것과 같은, 여성이 사회적 약자가 되는 전형적인 상황을 숱하게 접하셨을 텐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알고 싶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길게 늘였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아닌 어슷한 각도에서 문제를 볼 수도 있겠죠. 회사에서의 직위를 이용해 접대를 누리는 개인이 문제일 수도 있고, 이에 기생해서 굴러먹는 조직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야한 옷 입은 여자가 양주 따라주는 곳에서만 술 먹는 거래처 직원의 잘못인지, 실무 능력은 ㅈ으로 알고 ‘생산성’이라 명명한 접대 능력만 쳐주는 사장의 잘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누군가는 왜 여자가 굳이 그런 조직에 들어가서 고생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강조하고 있듯이 위는 제 개인적인 경험일 뿐 아니라 이 사회에 만연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규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제도적 장치들을 모두 제거했기 때문인가요?

잠깐 성 담론을 벗어나, 일차적으로는 ‘사회적 약자’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시는지 부터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은 사회적 약자가 맞나요? ■■■■님의 용어와 관점에서, ‘장애’라는 디폴트 값을 상수로 두고 각 개인의 여건과 환경에 따라서 최적화된 선택을 하게 방임해야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엄한 돈 쥐어짜여서 그 디폴트 값이 사회 생활에 최소한의 저해 사항이 되도록 복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요?


2. 혐오

혐오 자체를 타파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혐오가 제도화/정치화 되어선 안 된다는 사실은 혐오와 관련된 담론에서 너무 당연해서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지점입니다.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표현 자체를 문제시해야 한다는 거죠.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하고, 흑인을 노예화해야만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탐욕스러운 유대인을 몰아내야 한다”, “흑인은 멍청한 짐승에 불과하다.”라는 담론을 생산하는 것부터 문제라는 겁니다. (사족으로, ‘법의 차원에서 혐오 표현을 처벌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독일에서는 처벌 대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틀린 사실이라면 지적 바랍니다.)

■■■■님과 저의 댓글이 시작된 지점으로 돌아가보죠. 글쓴이가 ‘큰 누님’이라 표현하는 직원이 정말 국민 혈세 낭비하는 지랄맞은 공무원인 것과,
“역시나 짬 찬 여자는 다루기 힘들다.(예상하겠지만 무기계약직, 고졸 여상 졸업해서 나이 42살…”
이라는 문장이 특정 성별, 특정 계층에 대한 혐오 표현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전 댓글에서도 이야기한 이상한 범주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죠. 말이 빙빙 도는데, 저의 전 여자친구가 저를 혐오하는 것과, 일면식도 없는 여성이 저를 ‘한남충’의 일원으로 혐오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님께서 존재한다고 말씀하시는 혐오의 ‘실체’가 어째서 제게 씌워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 위의 표현은 문제가 없고, 이를 미러링하는 비합리적이고 유치한 시도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계속해서 지적하시는 이중 잣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3. 가정에서의 여성

‘양 당사자간에 합리적 협의하여 두 사람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형태로 나누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양육과 그 외 모든 가사 노동력을 측정하여 각자가 절반씩 부담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보 같은 일이겠죠. 그러나 ‘합리적 협의’로 양 당사자가 아름답게 만족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문제가 되는 것이고, ‘동등하게’와 마찬가지로 정의될 수 없는 ‘합리성’의 애매모호함이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왔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님과 저의 기준점에서 가장 다른 점은 ‘현대한국의 가정문화’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합리성으로 점철되고 양성 평등에 입각한 젊은 사람들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너무 좋은 면만 보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별 문제 없음. 문제라 하더라도 좌파 지식인들의 이중 잣대.’ 일변도로 나오시니 계속해서 말해봐야 지겨운 예시를 들게 됩니다. 아무리 요즘 세태가 바뀌었네 어쩌네 해도, 주변 친구들 결혼한 사례들을 생각해보면 남자(의 부모)가 집을 장만하고, 여자(의 부모)가 혼수를 채우는 경우가 아직 일반적입니다. 그들의 결혼 생활 역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게 되겠죠. ■■■■님과 저를 같은 세대로 묶을 수 있다면, 주변에 보수적인 부모를 둔 친구들의 에피소드가 많을 겁니다. 어린 시절 천도 복숭아는 아들만 먹을 수 있었다든지 하는 웃기는 얘기들이요. 우리 세대에 와서 끝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우리 세대의 시부모, 장인장모가 됩니다. 현 시점에서 보아도 전근대적인 문화는 현대적 합리성과 공존한다는 거죠. 말 나온 김에, “이제 고부 갈등보다는 장모와 사위 간의 갈등”과 같은 이야기는 새로워서 나오는 얘기입니다. 역설적으로 고부 갈등은 당연하고, 장모와 사위의 갈등은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거죠. 가부장제가 가상의 것이라고 느끼신다면 그것은 ■■■■님이 굉장히 리버럴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오셨고 본인도 그런 가정을 만드셨거나 만드시겠지만, 그걸 일반적이라고 덮어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위의 문단을 읽으며 ■■■■님은 “결혼도 선택, 출산도 선택인데 하기 싫으면 개인이 안 하는 거지 뭐가 문제냐”라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해서 같은 요지에서, “개인이 선택권을 가지는 것과, 그러한 전근대적 보수성과 비합리성에 손가락질 하는 건 다른 차원이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4. 육아의 사회적 책임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하시는 경제적 차원으로 들어가보죠. 직원의 출산이 이루어지면 자연히 출산휴가, 그리고 육아휴직을 부여 받습니다. 공무원의 경우 육아휴직 기간 40%의 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비용은 사회적 책임이겠죠. 세금 내실 때 일면식도 모르는 여자가 집에서 애 키우기 위해 본인이 쥐어 짜인다는 생각을 하는지요?

더 나아가, 근로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휴식 시간, 사용자가 부여할 수 있는 최장 노동 시간에도 반대하실 것으로 보여 두렵습니다. 시장의 매커니즘 속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더 일해서 더 벌고, 게으른 사람은 덜 버는 ‘적정 상태’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자유주의에 대한 교조주의적 믿음을 가지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5. 출산율과 노령 인구

저도 모든 사안에 대해서 국가가 디테일까지 디자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님이 묘사하는 모델은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신봉한 나머지 너무 낙관적으로 중·단기 미래를 바라보시거나,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계층을 무시한다는 느낌입니다. 주체가 누가 되었든 수명이 늘어나는 노령 인구의 생산력과 노동력을 사용하려 하겠죠. 그러나 통시적으로 보아도 구조가 형성되고 해체되는 사이에는 시간 차가 생기며, 그 갭을 줄이고자 미리 걱정하고 국가가 주체가 되어 대책이란 걸 강구해보자고 말하는 겁니다. 물론 같은 시간 안에서 변화에 발맞추지 못해 도태되는 개인과 기업에게는 관심이 없으시겠죠.


6. 기타

애초에 경제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자유시장 개념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자유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정주의적 관점을 가지는 사람도 있고, 경제학의 근간을 흔들 만한 정 반대 개념의 사회적 실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도 있겠죠. 이전 댓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님이 다른 의도로 이러한 얘기를 끌고 온다는 인상이 짙어 별로 더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애초에 토론이란 것 안에서 서로를 설득할 수 있다는 순진한 기대같은 건 하지 않지만, 선전물에 가깝게 자유주의를 원리적으로 찬양하면서, 학자 본인이 철회하고 수정한 선언을 지지하는데 딱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

민주주의와 관련, 대중이 멍청하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님과 정확히 똑같이 생각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여러가지로 안타깝네요.







일년쯤 되었나, 서점에 갔다가 놀란 일이 있다. 평소처럼 정치사회 코너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신간을 모아놓는 평대의 절반이 '페미니즘'을 주제로 쓰여진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을 전후로 해서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를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메갈리아', '워마드' 등 일부 극단적인 행태가 눈에 띄기 마련이기 때문에, 어떤 범사회적인 분위기라는 것 까지는 감지하지 못했었다.


이후 크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한번 더 눈이 가게 만든 사건은 이른바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이었다. JTBC 뉴스룸의 보도는 '메갈리안'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모두 '일베'로 만들었다. 진중권은 "그 초라한 남근들이 다발로 묶여 큰 승리를 거둔 모양"이라며 "나도 메갈리아인이다"라고 선언했다. 정의당은 메갈리아를 지지했고, 이 때문에 얼마 있지도 않은 당원들의 탈당이 이어졌다. (이 문제는 아직도 당 내부에서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회의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혐오를 용인할 것인가.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였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미러링'이라는 그들 방식을 납득하는 일이었다. 자국의 남성을 혐오하는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두 사이트를 벗어나 다른 커뮤니티 사이트로 옮아갔고, 이제는 굳이 어딘가를 찾아 들어가지 않더라도 인터넷만 켜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인터넷 공간에서 만큼은 여성과 남성이 서로를 말살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한 번 이와 관련된 글을 써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만 하고 글은 써지지 않았다.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가하는 인터넷의 전사들이 두려웠을 수도 있고, 아직 평가가 끝나지 않은 사회적 흐름에 관한 글을 썼다가 나중에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의도치 않게 위에서와 같이 '키보드 배틀'을 하며 이 주제에 밀접한 글을 쓰게 됐다. 논지는 전혀 다른 방향이 되었다. 원래는 JTBC의 보도 방향을, 진중권의 칼럼을, 정의당 당직자들을 비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키배'에서 나는 혐오 발언과 개저씨를 상대해야 했고, 마치 온전히 페미니스트였던 것처럼 글을 썼다.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다. 사실은 작금의 사회 현상에 '래디컬 페미니즘'이라 이름붙이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 페미니즘에 대해 깊게 공부한 적은 없지만, 한 쪽 성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그 반대를 혐오하는 형태가 하나의 진지한 운동이 될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차라리 생물학적 성을 부정하는 형태를 옹호하고 말지…



그래도 위의 게시판에서 해당 글을 읽고 말싸움을 해가며 느낀게 없지는 않다. 유행처럼 번져나간 남성 혐오와 미러링이 단지 새로운 것이라서 주목받았다면, '여성 혐오'는 그 근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해 있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 어쩌면 그래서 남성 혐오 현상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사람은 이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 혐오를 도려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