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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 stories

2017년 7월 10일, 장마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여름을 싫어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사에 의욕이 없는데, 덥고 습한 날씨가 그런 나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든다.


 

반대로 연중 가장 좋아하는 시기는 장마철이다. 비가 오면 괜스레 설레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고,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항상 흥에 겨운 마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아무 일 없이도 두근거리던 심장은 금방 차분해지고, 이따금 우울해지기도 한다. 평소 심심하리 만치 잠잠하게 유지되던 감정선이 비가 내리는 날만큼은 사춘기 소년처럼 요동을 치곤 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반복되는 걸 나는 즐기나 보다.


 

그래서 장마가 여름 중간에 찾아온다는 것은 반갑지 않은 일이다. 장마가 끝날 때면 마치 그동안 내렸던 비가 모두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는 느낌이다. 열기와 습기 때문에 숨을 쉬는 것조차 불쾌해진다. 통계에 따르면, 연중 여름의 비중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장마 또한 함께 길어지는 추세라고 한다. 나에겐 한 해 중 최고의 시기가 최악의 계절 안에 존재하는 이상한 공존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은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종종 마른장마라는 말도 들려온다. 그나마도 지겨운 여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장마에 비가 없다니, 세상 답답한 역설이다. 언제부터인가 장마철 기분도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감정의 진폭이 거의 없어졌다. 문득 이렇게 메마른 것이 날씨일까, 나의 내면일까, 궁금해졌다.

 


출근길에도 우산을 펼칠 때면 학창시절 그때의 기분을 잠깐씩 느끼곤 했다. 그러나 하루를 마칠 때까지 멍하니 비 내리는 풍경을 감상할 기회는 없었다. 사무실에서 벽이나 창을 등지고 앉는 이들은 부장 이상의 직급을 가진 사람들이다. 말단 직원이었던 나는 창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통로 근처에 자리를 가졌다. 빗방울이 맺힌 창문은 파티션 너머 저 멀리 있었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항상 블라인드를 내린 채 생활하기 때문에 콘크리트 벽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업무를 마치고, 밤에는 술자리에서 근무가 이어지고, 그 새 야속하게 비가 그쳐 우산을 접어 들고 퇴근할 때면, 그저 섭섭한 마음이 들곤 했다.




 

올해는 오랜만에 비가 많이 온다. 백수답게 밤을 새고 맞이하는 이른 아침, 해는 일찌감치 떴겠지만 장마철 구름에 날이 어둑하다. -하는 거센 빗소리가 들리니 예전에 두근대던 그 마음이 돌아온 것만 같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저렴한 청주를 사 들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간다. 옥상에 마련된 정원에는 감사하게도 작은 정자 형태의 지붕이 벤치와 테이블을 덮어주고 있다. 즐겨 듣는 노래 한 곡을 열 번쯤 반복해서 들었나 보다. 언뜻 이어폰으로 빗소리를 차음하는 것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어 노래를 끈다. 거센 바람에 장대비가 들이쳐 조금씩 옷이 젖는다. 여름의 복판인데도 으슬으슬해진다.



몇 년 간 마른 장마로 힘들었던 나를 위로해주는 것만 같다올 여름만큼은 이렇게 사랑스럽다.




 



2017년 7월 10일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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