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28, 2010
어젯밤 걱정했던 것처럼, 추위에 몸을 떨며 잠에서 깬다. 요란하게 진동하는 히터 앞에 손을 대보니 찬바람이 나오고 있다.
'차라리 끄고 잘 걸 그랬나…'
막 나갈 채비를 시작하려 하는데, 방의 전화벨이 울린다.
'리셉션에 모닝콜 같은 거 부탁한 적 없는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무함마드 입니다. 오늘 페트라 안 갈 건가요?"
가이드 아저씨, 다급한 목소리로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행의 하이라이트 페트라를 안 갈리가 있나.
"당연히 가죠!"
"페트라 입장 티켓은 입구에 맡길게요. 빠르게 따라 잡으세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뭐라구요? 8시에 호텔 입구에서 모이는 거 아닌가요?"
"지금 8시 15분이에요."
아뿔싸.
탁상시계가 문제였다. 그 동안 호스텔에서는 여러 사람과 한 방을 쓰며 알람기능을 사용할 수 없어, 트렁크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다가 어젯밤에야 처음 꺼낸 그 시계. 밀라노에서 현지까지 한 시간의 시차를 손목시계에만 적용하고, 탁상시계는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그래도 하필 페트라에서 사고를 치다니.
평소 학교에서 1교시 수업이 있는 날, 그 전쟁같은 아침보다 더 빠른,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옷만 입고 방을 나선다. 어젯밤 가이드가, 호텔에서 페트라 유적 입구까지는 매우 가까워서 걸어갈 수 있다고 한 기억이 난다. 다짜고짜 호텔 리셉션에 유적 입구로 향하는 길을 묻는다.
"페트라요? 문 닫았는데요?"
철렁, 가슴이 내려 앉는다.
"그럴리가요, 저와 같은 팀이 모두 가 있는데요?"
"아니, 2~3년 전에 잠깐 닫은 적이 있었다고요."
재미없는 농담에 주저앉을 뻔한 다리를 빠르게 옮긴다. 곧이어 눈에 띄는 인포메이션 센터. 상황을 설명하고 내 표를 어디서 받을 수 있는 지 물어본다.
"오늘 문 닫았는데요,"
이게 요르단 식 농담이로구나, 일관성 있네, 라고 생각하며 씨익, 미소를 보여준다. 직원은 재미없다는 듯 입구를 가르쳐준다.입구의 경비 담당자는 기다렸다는 표를 내어주고, 정문을 통과하니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이 펼쳐진다.
고대 도시로 향하는 길.
기암(奇巖)의 얼굴로 맞아주는 페트라의 입구에서부터 넋을 놓을 만도 하건만, 나는 탑덱 팀을 따라잡기 위해 경보 수준의 빠른 걸음을 시작한다. 가이드북에 의하면, 나는 Djinn Blocks, Obelisk Tomb, Bab As-Siq Triclinum 등의 거관을 지나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이 The Siq의 초입
높이 200m, 거리가 1.2km나 되는 협곡.
(엄밀히 말해 Siq는 canyon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대지는 물에 의해 깎인 게 아니라, 지질 구조상의 힘에 의해 분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 왼쪽과 오른쪽의 갈라진 모양새가 상당 부분 맞아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도시로 들어가는 이 절묘한 도입부를 정신없이 셔터만 눌러대며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느낌이 든다. 오늘만이라도 혼자 다녀볼까 잠깐 고민해보지만, 잃는 것이 더 많을 거라는 계산에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저 편에서 말과 마차, 조랑말에 손님을 태우려는 인부들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시계 잘못 본 게 자랑도 아니고, 그렇게 말 위에서 멋지게 등장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서 이 옵션 역시 포기한다.
'장밋빛 붉은 도시' 페트라.
자연이 만든 작품 치고는 너무도 기이한 게 사실이다.
다행히도, 저 멀리 20명쯤 되는 팀을 이끌고 있는 무함마드 아저씨가 보인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은근슬쩍 같이 설명을 듣기 시작한다. 물론 이 작전은 실패한다. 이미 주변의 몇 몇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주기 시작했으니까. "아니 그게, 시계가…" 이야기하면서도 참 부끄럽다. 무함마드 아저씨가 나를 알아보더니, 도리어 그 쪽에서 해명을 시작한다. 분명히 버스에서 숫자를 셌는데, 한 명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바람에 헷갈렸다고. 사실 팀원이 없는 줄도 모르고 출발한 잘못이 있기는 하니…. 나에게 전화한 시간, 유적 입구에 다다라서 한 차례 소란이 있었나보다. 그렇게 나는, 팀원들이 내가 있는 지 없는 지조차 모를거라 착각하고 있었지만, 이후로도 나는 늦잠잤다는 이야기를 십수번은 더 반복해야 했다.
자아, 그래서. 이 귀여운 분홍색 코끼리는 누구의 작품인가?
에 대한 설명으로 본격적으로 안내를 받아보려 했는데, 믿기 힘들지만, 이 것 또한 자연이 만들어낸 조각이라고 한다.
앞장서는 무함마드 아저씨와 뒤따르는 팀원들.
그 끝에는 신이라도 존재할 것만 같은, Siq의 좁은 길을 따라서.
사실, 곳곳에 자연이 아닌 인공 조형물 또한 존재한다. 협곡을 따라 흐르는 수로로부터 아래와 같은 조각까지.
그러나 적어도, 기나긴 Siq가 끝을 보이기 전까지는 사람이 만든 조형물에 관심이 덜 가게 마련이다.
기원전 6세기로부터 이 곳에 정착했던 나바테아인들. 그들의 종교에 대해 설명하던 무함마드 아저씨가, 조각의 발 부분을 유심히 보라고 한다. 팀원들이 바짝 다가서자 말하기를,
"신발을 잘 보세요.
Adidas 입니다."
우리는 허탈한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높은 곳만 보이면 원숭이처럼 뛰어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일행 중 한 명이 그 자리에서 서 있어 보라고 손짓한다. 사진을 찍어 주겠다며.
나는 시체 놀이가 잘 어울리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페트라가 가진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하루 중 해의 위치에 따라서 절벽의 색깔 또한 달라진다는 것이다.
정오가 가까워지며 이 도시는,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다.
드디어 Siq의 끝이 보이는 듯하더니,
마치 터널을 빠져나올 때 처럼 환한 빛이 눈을 부시게 하고,
그 끝에서 희미한 형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경이로운 순간.
이 곳이 Al-Khazneh(Treasury)
나를 중동으로 이끈 것이 바로 이와 비슷한 사진이었다.이름도 생소한 국가, 요르단과 시리아를 여행하라고 하는 아버지의 제안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버지의 여행기에서 본 알 카즈네의 사진을 보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여행객들이 페트라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그 장소.
이보다 더 위대한 무덤이 어디 있을까. (그 주인공은 나바테아의 왕 Aretas 3세라고 한다.)
모함마드 아저씨에 의하면, 황당하게도 내부에는 아무런 볼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아무리 복잡하게 설계했어도, 왕과 함께 매장된 수많은 보물들은 전부 도굴되었지만, 요르단의 조상은 현명했기 때문에 내부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단순하게 만들었다는 설명(!)
그럼에도 이 무덤에 영어로 Treasury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예전 이집트 군대가 고대 히브리인을 추격하던 중 파라오의 보물을 이 곳에 숨겼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란다. 아직까지 도굴이 성공한 적은 없기 때문에, 혹시 관심이 있다면 밤중에 몰래 다시 들어오라는 우스개 소리도 잊지 않는다.
"이 것 봐, 조각을 이어 붙인게 아니라 절벽을 그대로 깎아서 만든거라고. 망치질 한 번 잘 못 했다고 생각해봐. 다시 만들 수도 없잖아? X되는 거지!!!" 라며…
세심히 둘러보며 사진을 촬영하는 시간을 20분쯤 가지고, 사진상 오른쪽에 위치한 길을 따라, 다시 좁은 협곡으로 들어간다. ('이게 끝이 아니야!') 흔히 Outer Siq라 불리는 곳.
문자 그대로 '불가사의한' 무덤들의 모습이 이어진다.
정면에 가장 눈에 띄는 무덤이 Urn Tomb,
왼쪽에 분홍, 하얀, 노란 색으로 줄무늬가 생긴 것이 Silk Tomb,
이처럼 각각의 무덤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사진으로 나열한, 중요도가 떨어지는 무덤들엔 숫자가 붙어있다.)
이제 고대 도시 페트라의 중심을 향해,
12월 말에도 작렬하는 땡볕 아래서, 그리고 난생 처음보는 희안한 구경거리 앞에서, 팀원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듬성듬성 떨어져서 평소처럼 가이드를 에워싸지 않는다. 그 동안의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까, 오늘 일정은 도시 중심의 나바테안 박물관까지 안내한 뒤, 점심도 먹기 전에 끝이 난다. 오후 시간은 자유 선택.
애초에 페트라라는 고대 도시는, 물리적으로 하루 안에 그 모든 곳을 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현재 사진상에 위치한 곳을 기점으로, 제라슈 유적 전체에 버금가는 면적을 '중심'이라 칭하고 있으며, 주변에 무덤과 신전, 성채 및 교회 등이 산재해 있다. 론플에 소개된 하이킹 코스만 일곱개가 된다. 이 모든 것을 전부 구경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이드는 점심시간 즈음에 두어 개의 이동로를 추천해주고 일정을 마친다.
일단, 다들 흩어지고 뭉치며 점심을 해결한다. 어색하지만 나도 틈새에 껴서 분위기를 살핀다. 대체로 가이드가 강력히 추천한 Monastery로 가는 추세. 나도 대세를 따른다.
Monastery로 향하는 길, 이제는 더 이상 평지를 걷지 않는다.
등산 시작.
조망하며, 사진 찍으며 빠르지 않게 올라가고 있지만, 제법 숨이 찬다.
어깨에 박격포 하나 짊어지고, 900고지쯤 쉬지 않고 올라가던 2년간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렇게 계속 걷는다.
설령 지금 오르는 산 꼭대기에 무언가 특별한 기념비가 없다 치더라도, 이 등반은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느낀다.
그만큼 페트라의 기암절벽은, 그 자체로 장관을 이룬다.
그런데 왜 군대도 안 다녀온 서양인들이 힘든 내색조차 없이 산을 잘 타는 걸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
조랑말
산 꼭대기까지 큰 힘 들이지 않고 올라가는 수단이다. 책임 문제 때문에 가이드가 미리 이야기 해 주었는데, 조랑말의 등 위에서 하는 산행은 보기보다 위험하다고 하다. 실제로 낙마 사고가 종종 일어나기도 하고, 말이 사람을 태운 채로 절벽 밑으로 뛰어내리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 일행 중 걷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렇게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진 대지, 이 곳이 과연 목적지인가 했더니,
절벽에 가려졌던 Al-Deir(Monastery)가 모습을 드러낸다.
앞에서 보았던 Al-Khazneh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규모면에서 훨씬 크다.
기원전 3세기 나바테아의 왕 Obodas 1세의 무덤으로 추측되며, 비잔틴 시대 교회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내벽 때문에 Monastery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꽤나 길었던 등산을 단숨에 보상해주는 웅장함.
Al-Deir 맞은 편에는, 이 곳까지 힘들게 올라온 사람들에게 차(茶)와 음료 등을 파는 가판대가 설치되어 있다. 가서 한숨 돌릴까 생각하는데, 거기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 섞인 환호성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어댄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Al-Deir 꼭대기, 까딱하면 골로 가는 높이에서 베두인족으로 보이는 이가 묘기를 부리고 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장면.
그에게 박수를 보내며 휴식은 잠시, 등산로는 계속된다. 가판대 너머 계속 발걸음을 옮기면, Al-Deir를 위로부터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 나온다.
개미만큼 작게 보이는 사람들.
오늘도 증명 사진 한 컷 남기고,
영화 속에 나올 것만 같은, 거칠고 메마른 길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길 끝에
펼쳐진 풍경,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도심의 마천루와는 전혀 다른 첩첩산중의 풍경 앞에서.
Wadi Araba로부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 Jebel Haroun (라고는 하지만 알아볼 수 없다.)
세상과는 유리된 듯 한, 끝 없이 펼쳐진 산줄기 그 어느 지점.
가만히 앉아 사색에 빠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먼 곳을 바라보며, 장소 자체도 일생에 두 번 오기 힘든 곳이니만큼, 평소에 하지 못 했던 어떤 거시적 직관같은 게 번뜩 스쳐가길 기대한다. 그렇게 시작한 명상이건만,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성이나 앞으로 올 시간에 대한 불안같은 것들이 머리를 채우기 시작해서,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잡념만 확인한 채 시간이 흘러 그만두기로 한다.
돌아가는 길,
그리고 고지대에 사는 염소들.
같은 길을 되돌아가도, 느낌은 같지 않다.
오늘도 사람을 태우고 몇 번이나 끊임없이 산을 오르락 내리락 했을 불쌍한 당나귀.
그리고 내려오는 동안,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눈 친구.
외국인과 대화를 시작할 때, 내가 한국이라는 국적을 밝힘으로써 상대 쪽에서 꺼내기 가장 쉬운 이야기가 주로 북한과의 관계라든가, 그런 거라서 (이 때는 특히 연평도 포격으로, 한반도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았을 때다.) 가끔은 처음 보는 사람과도 정치나 국제관계 따위를 주제로 이야기하게 된다. 결국 나는 영국인인 이 친구와, 영국 왕실을 주제로 불편한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온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편의 덕에 최근 며칠간, 유적지 밖에서는 따로 걸을 일도 없었고 힘 들이는 데도 없어, 체력이 꽤나 비축되었나 보다. 가이드가 추천한 두번 째 코스를 찾는다.
그러나 아침과 또 다른 페트라 암벽의 빛깔 변화에 어찌나 정신줄을 놓고 있었는지, 걷다보니 알 카즈네가 보인다. 이 뒤로는 Siq 밖에 길이 없고, 시계는 이미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다. 무함마드 아저씨가, 4시 반경에 해가 지니 그 전에 호텔로 돌아가라 충고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아서, 재빨리 론플을 뒤져 가장 짧은 하이킹 코스를 찾는다. 운 좋게도,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는 25분짜리 등산로가 있다. 하지만 그 앞에는 예상치 못 한 표지판이,
[The course below this is dangerous and prohibited]
잠시 서서 고민하다가, 괜찮겠지 싶은 마음으로 몰래 표지판을 지나친다. 그런데 슬쩍 돌아보는 순간, 누군가 나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로 소리를 지른다. 관리인인가 보다. 눈치보지 말고 재빠르게 올라갔어야 했는데…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페트라에서의 짧은 하루 일정에 미련이 남아 만족스럽지는 못 하지만,
Siq가 인사한다. 여전히 스스로의 빛깔을 어둡게 바꾸어 가며,
안녕.
2010년 12월 28일 여행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