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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Milano/to Munich

München (1) 다하우 강제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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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 2010 @Munich, with ESN

 

유럽에 도착한 이후 나의 첫 여행이 된 이번 일정은, 교내 ‘ESN’이라는 단체에 의해 기획되었다. 잠시 이 단체 ESN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들은 전 유럽에 걸쳐 지부를 두고 활동하며, 각 대학에서 교환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업 및 문화 생활에 대한 안내를 하는 그런 동아리이다. 사실 이건 이들 스스로의 소개이고, 한달 동안 이들이 하는 일을 지켜본 결과 ESN의 주된 업무는 클럽 안내이다. 평균 이틀에 한 번 꼴로 "밀란의 전설적인 클럽 ***, 오늘 무료 입장" 등의 내용을 문자, 이메일, 페이스북을 통해 전송한다. 이 모든 초대를 스마트폰 하나로 받아보게 되는 나와 같은 경우, 이들이 주최하는 파티가 열릴 때마다 1분 간격으로 핸드폰이 대여섯 번쯤 울리게 된다. 어차피 가지도 않을 클럽인데,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겠다. 아무튼 다시 여행 이야기로 돌아와, ESN은 매년 이맘때마다 독일 뮌헨, 정확히는 OKTOBERFEST(2주 동안 진행되는 세계적 규모의 맥주 축제! 다음 포스팅에서 소개)로의 여행을 기획한다. 왕복 교통비 36유로,(약 \56,000) 무박 2일. 상당히 괜찮은 조건이다. 나는 옥토버페스트 보다는 뮌헨이라는 도시에 관심이 갔기 때문에, 이들이 제공하는 교통편을 이용하여 뮌헨에 도착한 뒤 혼자서 시티투어를 하기로 마음먹고 동행한다. ESN이 여행사도 아니고, 독일에서 내가 뭘 하든 신경 쓸 이들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서로 좋은 거다.

 


외국에 와서 처음 해 보는 일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육로를 통해 국경을 넘는 일도 그 중 하나다. 10월 1일 금요일 밤 11시 15분 경 밀라노에서 출발한 버스는 새벽 2시쯤 스위스 영토에 위치한 휴게소에 들른 뒤, 다시 다음 날인 토요일 아침 7시 뮌헨에 도착했다. 나는 국경을 넘나들 때 공항에서와 같은 출입국 심사관의 존재를 상상했지만, 그런 절차 따위는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기에 색다르게 느껴진다.


 

 뮌헨, 아침.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부터 밤까지의 하루. 그러나 대부분의 관광지는 오후 6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수많은 볼 거리 중 절반 이상을 포기하고 가장 가보고 싶은 곳들을 추려야 했다.

 

 뮌헨의 대표적인 장소 중 서너 곳을 꼽았고, 그 중 첫 번 행선지는 ‘다하우'다. 앞서 말한 맥락에서 다하우는 다소 특별한 선택이다. 이 곳은 과거 나치 독일이 처음으로 강제 수용소를 세운 역사적 장소지만, 뮌헨 중심에서 한 시간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관광지와의 연계성도 부족할 뿐더러, 이동 시간만큼 포기해야 하는 것들 또한 많아진다. 계획 단계에서 고민이 많았지만, 그래도 나는 ‘역사학도니까'라며, 뮌헨의 첫 번째 목적지를 다하우로 정했다.

 

 


날이 완전히 밝지도 않은 시간, 졸린 눈을 비비며 맥주를 향해 걸어가는 좀비같은 놈들을 바라보며 나는 지하철역을 찾아 헤맸다. 결국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Theresienwiese 광장을 지나(아침8시부터 이미 수 천쯤 되 보이는 사람들이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Goetheplatz역에 도착, U3 지하철을 타고 Marienplatz로, S2로 환승 후 Dachau까지, 그리고 다시 버스를 이용했다.



 

뮌헨의 지하철은 서울만큼이나 복잡하다. 노선의 숫자는 서울과 비슷하거나 조금 적은데, 중심으로의 밀집도가 높다 보니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복잡하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중심에 위치한 역들에는 동시에 9개의 노선이 지나다니기도 한다. 20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지하철 이용은 자신 있다 생각했지만, 목적지로 향하는 노선의 바른 방향 승강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뮌헨의 첫 인상.

 

깨끗하고 조용하면서 동시에 도시적이다. 어느 유명 매체가 매년 실시하는 조사에서, 뮌헨은 항상 ‘살고 싶은 도시’ 항목의 10위 안 쪽에 자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와서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역시 깔끔한 지하철 역 내부를 보며 이러한 것들을 느끼고 있을 때, 열차가 도착한다. 문 앞에 서서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하며 옆을 살피니, 사람들이 직접 손잡이를 밀어 문을 열고 열차에 오른다. 문이 반자동인가보다. 나도 원래 알았다는 듯 최대한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탑승해, 다시 문을 닫으려 꽤나 힘을 줬으나 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잠시 후 모든 문이 동시에 닫힌다. 닫히는 건 전자동이다. 아 이런… 현지인들의 시선을 느끼고 부끄러운 마음에 옆 칸으로 옮겨 타고 싶었지만, 열차간 이동도 불가능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나는 다하우에 도착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 (Dachau Concentration Camp)

 

 1933년 나치 독일에 의해 세워져서 패전까지 10년 이상 '정치범'들을 수용하던 곳이며, 이들 중 1/3 이상은 유대인이었다. 25,000명 이상이 질병, 영양실조, 자살 등으로 목숨을 잃었고, 각종 생체실험이 행해지기도 한, 20세기 역사의 가장 끔직한 현장 중 한 곳이다.

 

입구. “Dachau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는 독일 역사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 적혀있다.

 

 

 

 

정문을 통과하면 과거에 아침/저녁으로 수용자들의 점호를 실시하던 장소가 나온다. 물론 앞에 보이는 안내문구는 독일어와 영어로 적혀 있기 때문에 ‘점호’라는 용어는 볼 수 없지만, 같은 뜻을 가진 영 단어 ‘Roll-call’의 사진과 디테일한 설명은 나에게 2년간의 군생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현재까지 SS(친위대) office 건물이 유지되어, 이 곳 수용소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늘여놓은 패널에 사진과 글을 덧붙여 전시가 이루어진다. 여유를 가지고 글을 읽으며 불과 70년 전 일어난 참극을 느껴보는 시간이 이 곳을 방문하며 내가 기대한 바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오전의 반 이상의 시간을 사용했고, 남은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에 발걸음을 빨리 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wikipedia를 정독하는 걸로 대신하기로 하고, 시각적인 감상을 위주로 대부분을 지나쳤다.

 

 

복원된 막사. 사람 사는 곳이라기보다 닭장에 가깝다. 위의 패널에 붙은 사진에서처럼, 이 비좁은 침상에 두 명씩 붙어 잠을 잤다고.

 

 

34개의 막사가 두 줄로 길게 배치되었고, 그 사이를 ‘camp road’가 가로지른다.

복원된 두 개의 막사를 제외하면 현재는 모두 자갈밭이다. 황량하다.

 

 

 

막사 터를 한창 걸어 지나가니 건물 몇 몇이 띄엄띄엄 서 있다. 제 각각 다르게 생겼지만 은근히 조화롭다. 알고 보니 모두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들이다. 러시아 정교회, 개신교회, 카톨릭 성당과 카르멜회 수녀원, 그리고 유대교 추모비가 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이렇게 제 각각인 종교들이 한 데 들어와 있다.

 

 

 

 

이 곳 다하우 수용소를 방문하기 전과 후에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으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한국 사람들이 이 수용소의 존재를 두고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옳지 못한 과거에 대한 독일과 일본의 태도를 비교’하는 일인데, 한 마디로 말해 “독일은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있는데 일본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냐”라는 거다. 하지만, 이러한 연관은 과연 유의미한 발상일까.

분명 독일은 이 곳 수용소와 같은 국가의 치부를 보존하고 드러냈으며, 공식적으로 반성의 제스처를 취하기를 꺼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예로 1970년 독일의 총리 브란트가 폴란드를 방문하여 나치에 대항하다 숨진 무명 군인들(유대인을 포함)의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사건이 유명하다. 반면 일본의 총리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들의 비판을 받아가며 ‘전쟁 신사’라 불리는 야스쿠니를 참배했으며, 동시에 떳떳하지 못한 역사는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독일은 지난 날의 과오를 반성하여 부정적 역사를 청산하는 ‘쿨한’ 나라이고 일본은 그렇지 못하다” 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많이 빗나간 일인 듯 하다.

역사적으로 짧은 순간 일어났던 대학살, 그리고 35년간 이루어졌던 식민지배를 동일 선상에 놓는 것에서부터가 무언가 어색하다. “독일에 비하면 일본이 잘했네”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사실 비교해야 할 대상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시선이라는 거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전 세계적 충격과 일제의 조선지배에 대한 그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비교가 가능하다 . 어떤 제국주의 국가도 일제만큼 잔인하고 악랄하게 식민지배를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19/20세기 제국주의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성하거나 혹은 반대로 잘못되었음을 맹렬히 비난하는 국가는 없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세계대전에 대한 패전국들의 책임만이 남았을 뿐이다. 독일로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일들이 전 세계적 시선을 고려할 때 지극히 당연하고 의무적인 행보였고, 실제로 독일의 정치인들이 그 나라의 대표로서 과거 나치의 행적에 대하여 진심으로 유감을 느끼고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은 이미 오전의 끝을 향해,


다음 목적지인 뮌헨의 중심, Marienplatz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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